연습실 바닥의 나무는 전날 비맞은 공기냄새와 섞여 후각을 자극했다.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냄새지만 간혹 이런 것도 나쁘지 않군. 간만에 느껴보는 상쾌함에 나는 살짝 열려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. 생각했던 것 보다 바람이 세게 들어와 다시 닫을까 잠깐 생각했으나 이건 또 이거 나름대로 좋으리라. 깊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 할 악보를 옆에 놓았다. 그리고 생각했다. 뭘 칠까. 어떤 곡을 치면 좋을까? 악보는 하나지만 어떤곡을 칠지를 고민하는 내가 바보 아닌가 하는 잡념 등을 하며 건반 위에 살며시 얹은 손을 멍하니 바라보았다. 남자손임에도 여자손 만큼 곱고 가는 내 손을 보고 있자면 천상 악기쟁이구나.
  건반이 차다. 라(A)음을 길게 눌러본다. 건반을 누르는 것은 분명 나인데 오히려 피아노가 손가락을 누르는 듯 한 그런 묵직함이 느껴진다. 음악의 무게. 평생 내가 마주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존재에 대한 무게. 그 묵직함이 어디서 느껴지는 무게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내 손가락이 말을 거는대로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피아노음이 정직함은 잘 안다. 문득 머리를 스치는 슈만의 유랑의 무리로 곡을 정하고 피아노 위로 손가락을 바삐 움직여본다. 과거를 떠올려보면 어릴적에 꽤 좋아했던 합창곡이었다. 악보도 없이 감에 의존하여 연주하는것 치고 꽤 잘 맞아들어가고 있었음에 확실히 그동안 많이 성장했구나 하는 착각에도 잠시 빠진다. 

  바람도 시원하고 어릴적 추억의 연주도 이렇게 신나는데 곡이 끝나면 눈 빠질 듯 어려운 악보와 마주해야 한다. 그 생각을 하니 숨이 턱 막혀온다.

"바람쐬기 딱 좋은 날씨잖아."
  아까부터 조금씩 솟아오르는 해방 충동을 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바로 창문을 넘어 밖으로 뛰쳐나왔다. 그리고 바람이 가장 시원하게 불 것 같아 보이는 작은 언덕을 향해 연습실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뛰었다.

"고얌나무 숲 우거진 그늘에 호탕한 잔치 벌어져 있도다. 쌓아올린 횃불 황홀한 그 아래 나뭇잎을 모아 앉아 있도다."
  노래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지만 마음을 상쾌하게 적셔주는 바람에 취해 어느 새 내 입은 노래를 흥얼 거리고 있었다.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실성한 듯 노래를 부르는 미친놈처럼 보였겠지만 지금 내 마음 속은 금방이라도 터질 것 처럼 부풀어 오른, 오직 음악을 향한 즐거움만 선명하게 남아있었다.

"그들은 떠도는 유랑의 무리─"

  언덕 가장 높은 곳 까지 올라 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. 하늘을 보며 좀 더 유쾌한, 자유로운 생각에 잠겨본다. 꽤 괜찮은 일탈이었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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츠치우라 료타로. 졸업 후.
요코하마가 아닌 좀 더 자연과 친숙한 곳에 위치한 연습실은 어떨까 해서 써보았다.
나도 미친척하고 밖에 나가서 풀냄새 바람냄새 듬뿍 맡으며 뛰어다니고싶다!!!

사실 오늘 쓴건 아니고 예~전에 썼던 내용을 칼질하고 칼질해 다시 꺼내놓은 버전.

Posted by 수향